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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 in History] Apri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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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9, 1906: In Los Angeles, Holiness minister William Seymour and several associates experience what they called the "baptism of the Spirit," marked by speaking in tongues. This launched the three-year "Azusa Street Revival," considered the first major public event of Pentecostalism. Available from https://www.christianitytoday.com/history/today/april-9.html

[Today in History] April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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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8, 1901: After nearly 30 years of successful church planting in New Guinea, Presbyterian missionary James Chalmers (accompanied by missionary Oliver Tomkins, who had just arrived in the field) sets out to explore a new part of the islands. No one ever saw the two again. A rescue party learned the men had been clubbed to death and eaten by cannibals. When London preacher Joseph Parker heard the news, he exclaimed, "I do not want to believe it! Such a mystery of Providence makes it hard for our strained faith to recover. Yet Jesus was murdered. Paul was murdered ... I cannot but feel that our honored and nobleminded friend has joined a great assembly. Available from https://christianitytoday.com/history/today/april-8.html

[Today in History] April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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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7, 1541: On his thirty-fifth birthday, Francis Xavier, cofounder of the Society of Jesus (Jesuits), sets sail from Lisbon, Portugal, for Goa, India. The first Roman Catholic missionary there, he also traveled to Japan, Sri Lanka, and other countries in Asia. It is hard to say how many people Xavier, the Roman Catholic patron saint of all missions, converted; the figure goes as high as 1 million, but modern scholars peg the number around 30,000. Jesuits claim 700,000. Available from https://christianitytoday.com/history/today/april-7.html

[Devotion] 3월 3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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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사순절기간 생명존중주간이라는 한주간의 특별기도회가 한국로잔위원회와 행동하는 프로라이프(Pro-Life)가 더불어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 말씀을 전한 분 가운데 한 분으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안양 샘병원의 박상은 원장의 말씀에서 큰 영감 어린 메시지를 들은 적이 있다. 낙태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새겨본 말씀이었다. 12월25일 성탄절은 기독교전통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추정하는 날짜로 여기는 날이다. 하지만 이날은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태어난 시점을 말한다. 인간의 출산과정에는 출산이전 자궁에서 먼저 수정되는 순간 혹은 잉태되는 시점이 있다. 그 후 수정란은 발생과정을 거쳐 배아가 되고 태에서 10개월간의 기간을 거치게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the Word became flesh)라고 선포한 요한복음의 말씀(1:14)은 그 시점을 출산일이 아닌 잉태일로 볼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성육신의 의미를 담는 성탄절은 12월25일보다는 잉태일로 산출되는 4월1일이 된다. 계산법으로 본다면 3월32일이라고 하는데 이는 4월1일이고 세간에서는  이날을 만우절(April Fool’s Day)이라 하기에 이날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강조한 의미에서 만우절인 4월1일 보단 3월32일로 그날을 명명해 본 것이다.  이미 성육신날은 개신교전통에서는 거의 생각도 하고 있지 않은 전통이지만 교회의 고대전통에서는 Feast of Annunciation으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수태고지를 한 날로 기념하고 있다.  시리아의 초대 교부인 에프렘은 이 날을 들어 이렇게 찬송시로 적고 있다. 마리아의 귀를 통해 전해진 천사의 소리가 순종으로 이를 받아들인 그녀의 귀에서 결국은 생명의 주를 탄생케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이는 마침 이브가 그 귀를 통해 전해들은 마귀의 소리를 청종함으로 결국 죄악과 파멸을 낳게 한 것과 대비된다는 댓구적 표현으로 기가 막힌 표현을 한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정교회, 가톨

[Ministry Newsletter] April,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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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otion] Passion Week, Day 7. Do You Love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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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뵐 낯짝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와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주님은 조반을 준비하셨고 다시금 주님을 가까이 대면한 그와 예수님의 대화가 시작된다. 이 쑥스런 상황에서 말을 먼저 건넨 이는 물론 주님이셨다. 질문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였다(요21:15). 비교급이었다. 베드로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는 감옥과 죽음까지 불사하겠노라고 한 바가 있었다(눅22:33). 주님은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간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다. 세 번째도 역시 같은 질문이었다. 세 번씩이나 되풀이 되는 같은 질문에 베드로의 대답은 점점 더 자신감이 약해져 가는 것 같이 보인다. 왜 세 번씩이나? 그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해서일까? 그런데 더 의아한 것은 예수님의 답변이다. 고맙다라는 말도, 섭섭했었다라는 말도 아니고 뜬금없는 말처럼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말로만 대꾸하신다. 베드로의 심정을 몰라 동문서답하실 분이 아니지 않는가? 비록 세 번씩이나 그를 부인한 것이 사실이나 주님은 누구보다 베드로가 그를 향해 갖고 있는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알고 계신 분이시다. 그의 연약함을 가장 체휼하시는 분이시다. 요한이 기술한 이 대화에서 나타나는 간극은 사실 누가의 기록에서 풀린다.   누가는 유월절 만찬에서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눅22:31-34). 사단이 베드로를 밀까부듯 하려고 청구하고 있다고 하신다. 베드로를 농락하려는 사단의 획책을 알고 계신 것이다. 사단도 이러한 농락을 요청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의 ’허락’ 없이는 농락마저도 불가능함을 시사한다. 이러한 획책을 불허하심으로 충분히 사단의 소행을 막으실 수 있는 주님이시겠지만 그분의 답변은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는 말씀

[Devotion] Passion Week, Day 6. 하나님의 속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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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20대 초반 어느 수련회에서 말씀을 나누다가 창세기22장의 베일이 벗겨지며 그 진의를 깨달은 적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독자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다. 그때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논리적으로는 25년을 기다리다 얻은 독자 이삭을 왜 느닷없이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는지… 그렇다면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 약속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 감정적으로나 의지적으로는 왜 하나님이 불로 태워 바치는 잔인한 인신제물을 요구한 것인지, 그리고 가장 아끼고 싶은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신에게 과연 순종할 수 있는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사건에 대한 수많은 설교의 방점은 대부분 ‘순종’에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인식된 하나님은 가련한 아브라함의 순종 테스트를 차가운 시선으로 관조하는 신으로 밖에는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인공과 핵심은 아브라함도 순종도 아닌 또 다른 차원에 있었다. 바로 숨겨진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이 사건의 진의를 볼 수 있는 단어는 ‘독자’(only son)이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창22:12). Sounds familiar? 어딘가 익숙한 표현이 아닌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구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요한은 분명 창세기의 이 장면을 생각하고 이 구절을 기록하였으리라 본다.  그 수련회 이후 나는 이 장면을 순종 테스트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이삭이 이후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리아의 현장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에겐 바로 갈보리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고뇌보다 더 큰 고뇌로 이 현장에 참여하고 계신 하나님... 오직 다른 점이 있다면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은 죽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독자 예수님은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