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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otion] 3월 3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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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사순절기간 생명존중주간이라는 한주간의 특별기도회가 한국로잔위원회와 행동하는 프로라이프(Pro-Life)가 더불어 진행되고 있다. 여기서 말씀을 전한 분 가운데 한 분으로 지금은 고인이 되신 안양 샘병원의 박상은 원장의 말씀에서 큰 영감 어린 메시지를 들은 적이 있다. 낙태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성육신의 의미를 새겨본 말씀이었다. 12월25일 성탄절은 기독교전통에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추정하는 날짜로 여기는 날이다. 하지만 이날은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 태어난 시점을 말한다. 인간의 출산과정에는 출산이전 자궁에서 먼저 수정되는 순간 혹은 잉태되는 시점이 있다. 그 후 수정란은 발생과정을 거쳐 배아가 되고 태에서 10개월간의 기간을 거치게 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the Word became flesh)라고 선포한 요한복음의 말씀(1:14)은 그 시점을 출산일이 아닌 잉태일로 볼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성육신의 의미를 담는 성탄절은 12월25일보다는 잉태일로 산출되는 4월1일이 된다. 계산법으로 본다면 3월32일이라고 하는데 이는 4월1일이고 세간에서는  이날을 만우절(April Fool’s Day)이라 하기에 이날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강조한 의미에서 만우절인 4월1일 보단 3월32일로 그날을 명명해 본 것이다.  이미 성육신날은 개신교전통에서는 거의 생각도 하고 있지 않은 전통이지만 교회의 고대전통에서는 Feast of Annunciation으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수태고지를 한 날로 기념하고 있다.  시리아의 초대 교부인 에프렘은 이 날을 들어 이렇게 찬송시로 적고 있다. 마리아의 귀를 통해 전해진 천사의 소리가 순종으로 이를 받아들인 그녀의 귀에서 결국은 생명의 주를 탄생케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이는 마침 이브가 그 귀를 통해 전해들은 마귀의 소리를 청종함으로 결국 죄악과 파멸을 낳게 한 것과 대비된다는 댓구적 표현으로 기가 막힌 표현을 한 것이...

[Devotion] Equal Night (교회사속의 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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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다고 해서 Equinox (Equal Night)라 이름붙여진 춘분. 해마다 양력으로 3월 20-21일경쯤 일어난다. 가을에 일어나는 같은 현상을 추분이라 부른다. 이는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지지 않고 똑바로 태양을 바라보는 때이다. 동양에서도 24절기 가운데 하나인 춘분은 봄을 알리는 절기이다.  기독교역사에서 볼 때 춘분은 구약의 유월절, 신약의 부활절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바로 이때를 기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춘분을 기점으로 고난절과 부활절의 교회력을 산출하여 준수했다. 그러나 시간사용이 통합되지 않았던 고대에는 교회력준수에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다.  근본적인 차이점의 한 예로 부활절 준수 일자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부활절은 범교회적으로 중요한 절기임에는 두 말할 나위가 없으나, 이를 준수하던 일자는 지역에 따라 달랐던 것이다. 결국 AD 325년에 있던 니케아 공회의(Council of Nicaea)에서는 이를 춘분을 지나 찾아 오는 첫 만월(full moon) 이후 첫 주일(Sunday)로 규정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력은 기독교내의 여러 전통에 따라 틀리게 준수되었다. 그 예로 켈트기독교와 로마기독교 사이의 차이를 들 수 있겠다. 서방기독교인 로마가톨릭은 예수님의 부활이 일요일에 발생한 것을 기준하여 부활절 요일을 주일(일요일)로 확정하여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켈트전통은 구약의 히브리 월력을 따라 니산월 14일, 즉, 유대인의 유월절날(Passover)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한 것이다. 따라서 음력 월력의 일자를 따른 켈트 전통에 의하면 부활절준수는 꼭 주일이 아닌 다른 요일에도 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차이점은 단순히 켈트식과 로마식의 칼렌다 산출 방법이 틀린데서 기인한 것 뿐 아니라, 구약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고난을 강조하고 기록된 날짜(니산월 14일)를 따르려 했던 켈...

[Devotion] St. Patr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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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어려서부터 나는 초록색이 좋았다. 자연의 색깔이라서 그런가? 미국에 와보니 녹색의 페스티벌이 있었다. 자연 녹색을 좋아하였으나 St. Patrick’s Day (March 17)는 내가 좋아하는 녹색만큼이나 친근하진 않았다. 교회사를 공부하며, 또 선교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패트릭(St. Patrick, c.385-461)이라고 하는 인물에 관해 알면서 이제는 녹색만큼이나 패트릭이 좋아진다. 패트릭에게선 녹색만큼이나 촌스러운 면도 있으나 녹색만큼이나 신선(fresh)한 맛도 풍기기 때문이다.  패트릭은 원래 영국사람(English)이었다. 당시 영국의 이웃으로 마주보고 있던 아일랜드(Ireland)는 친근한 벗으로가 아니라 흉악한 원수로 있었다. 영국과 스콧틀랜드의 해안으로 침입하여 노략하고 약탈해 가는 것이 그들의 산업이었다. 패트릭은 납치된 소년가운데 하나였다. 6년간 노예로 초원의 등성에서 양을 치며 밤하늘을 바라보았지만 낯선 땅, 노예로 잡힌 땅은 시간이 흘러도 정착될 수 없는 타향이었다. 밤마다 부르짖던 그의 소원에 응답이 온지라. 꿈에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드디어 그곳을 극적으로 탈출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한 그는 오랜 세월 자신의 죄성을 정화하며, 소명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 받쳐질 삶을 준비하였다. 그가 벗어난 땅에 대한 기억은 미련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 땅으로 인해 번민하여야 했다. 그를 노예로 삼은 그 땅, 거기서 부르는 환영이 그 이유였다. “성 소년 (holy youth), 패트릭, 우리에게 다시 와서 우리를 도와주라!” 그것이 성경에서 바울을 부른 마게도냐인의 환영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면 조금이나마 거절할 여유를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패트릭의 영혼 깊숙이 거부할 수 없는 소명으로 인해 밤마다 괴로워 했다. 정작 그를 자유케 한 것은 바로 그 거부할 수 없는 소명에 응답하여 자신의 운명을 내어 맡긴 순간부터였다. 이전엔 ...

[Devotion] Thy Kingdom 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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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역사의 최종 목표는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본다. 인생의 최종의미는 어디서 발견될 수 있을까 물어 본다. 미얀마에서 싸이클론으로 인해, 중국에선 지진으로 인해 죽은 희생자들의 가족이 흐르는 눈물들은 보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자아낸다. 수백 년간 왕정으로 있던 네팔이 공화국으로 정치체제를 바꾸려 한다. 왕이 있었지만 백성들에게 준 유익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상 수년 전 비참한 최후로 왕과 왕비가 피살되고 말았다. 요사이 일어나는 많은 천재, 인재 등을 볼 때 마다, 정치적인 격돌 등을 볼 때 마다 찾아 오는 생각이다. 이렇게 불안하고 불완전한 세상이 반영해 주는 것이 무엇일까?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 이세상… 이세상을 창조하신 완전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하심은 반드시 와야만 되지 않겠는가? 완전한 그의 나라가 반드시 서야 되지 않겠는가?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이 땅에 왕국을 건설하려는 성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성경은 그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니므롯이 시날 땅에 건설하려 했던 나라에서부터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제국들의 등장을 본다. 끊임없이 제국을 향한 간단없는 움직임이 역사 속에 계속 되고 있다. 인간의 성정 안엔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당신의 형상의 일부인 ‘통치권’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 해석된다. 왕이나 지도자의 권한은 사실 하나님께로서 온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가르쳐주고 있다(요19:11). 결국 이세상 지도자들의 권세는 하나님께 속한 권세를 허락 받아 rent받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죄인이기에 신성한 통치권을 제대로 쓴 자가 없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전환점이 된 신정에서 왕정으로의 이양 (사무엘상 배경) 은 이러한 하나님 외에 완전한 통치자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 역사적 교훈이었다. 어느 한 나라도 망하지 않고 지속된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역사상 스러져간 제국이나 왕국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결국은 ...

[Devotion] The Gospel, History, and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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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하나님 사랑과 역사에 대한 나의 관심은 군대생활 중 꿀보다 더 달게 느껴졌던 성경을 읽으면서 유발되었다. 성경은 그 시작부터 끝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Love Story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구속의 대장정이었다. 당시 과학도였던 나는 그 때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시간속으로의 여정을 즐기게 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20년간 학업과 목회사역을 하면서 특별히 복음전파와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는 시각에서 역사를 주목해왔다.   인류의 역사는 ‘복음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저무는 석양을 보면서 시편 19편 (1-6절)의 말씀과 함께 이러한 영감이 떠 올랐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의 시작은 마치 태양이 하늘을 운행하는 것처럼 인류의 역사 속에 행보하여 왔다. 이제 서구의 기독교는 황혼의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반면에 비서구 세계에서 일어나는 폭발적인 부흥과 선교운동들을 본다. 마치 석양은 이러한 실상을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서구의 반대편 땅에선 복음의 빛이 여명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구촌 기독교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마치 ‘씨앗’과도 같다. 이 세상에 신비로운 하나님의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씨앗이라고 하는 잠재적 생명체일 것이다. 거기엔 하나님의 지혜와 솜씨로 완연히 발현될 생명의 모습이 DNA라고 하는 설계도에 담아져 신비스럽게도 포장되어 있다. 기나긴 지난 역사 속에서 이 복음은 지구촌 곳곳에 뿌리어지고,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어왔다. 그리고 또다시 씨앗을 창출해 낼 것이다. 오늘날 나와 여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열매인 것이다. 열매는 언제나 씨앗을 창출해 낸다. 나는 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복음의 에이전트’(The Gospel Agent)로 생각하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또 말씀하신 그이처럼, 한 알의 밀알인 것이다. 이번에 이렇게 지면을 통해 나의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