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votion] 10 Days of Prayer, Day 10. Holy Spirit as Disturber

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역사 속에 임했던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상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동체적이고 보편적인 역사인 동시에 개인적이며 독특하기에 한마디로 논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 역사에 있어서도 성령론 만큼 다른 해석을 갖고 있는 영역은 없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한 것이다. 성령은 ‘보혜사’(Comforter)의 영이시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 위로와 안위를 주시는 분이시기에 앞서 죄의 문제를 다루 실 분으로 오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은 ‘책망의 영’(Disturber)이시다. 영적 갱신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미국과 스코틀랜드에 있었던 1차대각성운동의 현장들을 돌아보며 또한 그 기록들을 읽어보면서 성령의 역사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각성운동은 죄를 질타하고 중생을 강조했던 영적 갱신운동이었지만 그 메시지는 언제나 두 가지 다른 반응을 불러왔다. 이에 대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일부는 죄를 회개하고 영적으로 거듭남(regeneration)의 체험으로, 일부는 이에 대해 편견을 갖고 영적으로 역행(degeneration)하는 반응으로 맞섰다고 논하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반응은 결국 교회를 분열시키고 만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광신적으로 비추어질 만큼 감정적, 신체적으로도 이상스러운(extraordinary) 현상들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러기에 이 영적 각성의 시기는 또한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이해에 대단한 혼돈기이기도 했다. 그 자신의 교회에서 이미 영적 대각성을 목도한 에드워즈는 이러한 때 깊은 성찰로 대각성운동을 변호한 신학적 대변자요 목회자였다. 일단 그는 그가 말하는 소위 ‘Religious Affection’(신앙적 열정 혹은 감성)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는 신앙적 열정을 광신으로 매몰았던 자들에 대해 그러한 열정 자체는 부인할 대상이 아니라 분별해야 할 대상임을 주장하였다. 그는 감정과 함께 수반되는 신체적인 현상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을 참된 신앙(true religion)의 징표(sign)로 동일시 하지는 않았다. 마치 연애의 감정(infatuation)과 진정한 사랑(love)을 구별한 것과 같은 것이다. 참된 신앙은 일시적 현상이 아닌 지속적 결과로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단 것이다. 그리하여 그 열매를 보고 나무를 판단할 수 있다고 하신 말씀(마7:20)처럼 성령의 열매들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행실을 참된 신앙의 표징으로 본 것이다. 

이제 에드워즈 목사가 강조한 그  거룩한 열정(‘Holy Affection’)을 사모해 본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9). 충격적인 사실은 내 안에 아직도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가지 바람이 있다면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일 뿐이다.  Come Holy Spirit as Disturber! 亨










Comments

  1. 은혜로운 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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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고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기를... 저도 오늘 하루 이것을 구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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