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votion] Passion Week, Day 6. 하나님의 속사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20대 초반 어느 수련회에서 말씀을 나누다가 창세기22장의 베일이 벗겨지며 그 진의를 깨달은 적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독자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다. 그때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논리적으로는 25년을 기다리다 얻은 독자 이삭을 왜 느닷없이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는지… 그렇다면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 약속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 감정적으로나 의지적으로는 왜 하나님이 불로 태워 바치는 잔인한 인신제물을 요구한 것인지, 그리고 가장 아끼고 싶은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신에게 과연 순종할 수 있는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사건에 대한 수많은 설교의 방점은 대부분 ‘순종’에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인식된 하나님은 가련한 아브라함의 순종 테스트를 차가운 시선으로 관조하는 신으로 밖에는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인공과 핵심은 아브라함도 순종도 아닌 또 다른 차원에 있었다. 바로 숨겨진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이 사건의 진의를 볼 수 있는 단어는 ‘독자’(only son)이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창22:12). Sounds familiar? 어딘가 익숙한 표현이 아닌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구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요한은 분명 창세기의 이 장면을 생각하고 이 구절을 기록하였으리라 본다. 

그 수련회 이후 나는 이 장면을 순종 테스트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이삭이 이후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리아의 현장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에겐 바로 갈보리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고뇌보다 더 큰 고뇌로 이 현장에 참여하고 계신 하나님... 오직 다른 점이 있다면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은 죽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독자 예수님은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 사건을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은 바로 2000년 후 갈보리의 현장에서 재현될 진짜 희생의 사건에 미리 초청하는 것은 아닌지... 왜, 아브라함의 말년에 이 끔찍한 현장으로 아브라함을 초대하고 계신 것일까? 상상해 보건대 아브라함을 특별히 ‘벗’ 혹은 ‘친구’로 부르셨던(대하20:7; 사41:8; 약2:23) 하나님은 분명 누군가에게 이 구속사의 비밀을 나누고 싶어하신 것이 아닐까? 진정한 친구 사이는 부모형제에게도 나누지 못할 자신의 깊은 속사정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아닌가? 실로 창세기18:17에서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하셨고, 요한복음15:15에서는 예수님께서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고 하셨다. 어느 목사님은 이를 일컬어 “Divine Friendship”(신과 인간의 우정)이라고 표현하였다. 어찌 보면 하나님은 구속사의 서막에 그의 벗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깊은 속사정을 이러한 사건으로 이야기하고 싶어한 것일지도 모른다. 천사들도 그토록 살펴보기 원하는 그 구원의 경륜을!(벧전1:12) 

수년 전 멜깁슨이 감독한 “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에서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있었다. 바로 하늘 높은 곳에서 바라본 갈보리의 현장이었다. 멜깁슨이 카메라의 앵글을 하늘 위로 올린 것은 마치 영화의 백미와도 같았다. 예수님이 운명하자 땅을 진동시키기 시작할 한 방울의 빗방울 같은 것이 떨어지고 있었다. 분명 하늘에서 그 아들 독자를 바라본 하나님의 눈물이었으리라. 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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