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votion] 10 Days of Prayer, Day 3. Divine Shyness
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기독교작가 필립 얀시(Philip Yancey)가 쓴 Disappointment with God(하나님께 실망을)이라는 책이 있다. 거기서 얀시는 의미 있는 관찰을 한다. 구속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소통(communication) 방식이라 할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볼 때 그 초기에는 권능(mighty power)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애굽의 열 재앙, 홍해를 가르는 기적, 시내산의 불과 연기 나팔소리, 불기둥과 구름기둥, 만나와 물, 여리고성의 함락 등등… 구약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역사들이 하도 크다 보니 주변민족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해 간담이 녹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수2:9-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일관됨을 본다. 성전에 불로서 나타난 역사를 본 솔로몬,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를 통해 임한 하나님의 능력을 본 아합과 선지자들. 그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의 심성엔 변화가 없었다. 아무리 대단한 기적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믿음과 영성을 증진시키는 일엔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얀시는 인간을 다루시는 전략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권능을 버리고 사랑으로 접근했다고 말한다. 그 사랑이 희생을 동반할 때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긴긴 구약의 역사 후 하나님은 400년 동안 숨어 계시다가 성육신하셔서 친히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 그가 많은 기적을 행하였지만 어떤 이들은 그가 바알세불, 즉 마귀의 능력을 빌어 일으킨 기적이라고 비난한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눅16:19-31) 음부의 고통을 맛본 부자가 그 남은 친척들에게 음부에 오지 말라는 메신저를 보내달라 하였을 때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모세와 선지자들을 듣지 아니하면 설령 죽은 자가 살아나서 아무리 떠든다 한들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승천 후 또 한번의 역사가 있었다.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다. 성령은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셨다. 구약의 시내산 강림이나 신약의 성령 강림이나 모두 오순절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전자는 율법을 돌판에 새겨 주신 것이요, 후자는 성령을 마음에 새겨주신 것이었다. 이로 볼 때 하나님은 과연 권능이 아닌 사랑의 모습으로 사람에게 다가오신 것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으로 볼 땐 위험한(risky) 비즈니스이다. 하나님의 권능을 스스로 제한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성육신 사건으로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시공의 제약 속으로 들어오셨다. 결국 예수님은 그가 창조하신 인간에 의해 어처구니없이 살해되어야 했다. 오순절사건으로 성령님은 사람의 인격 안으로 들어오셨지만 이 또한 제한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의 마음 여하에 따라 성령을 근심케 할 수도 소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이야기는 두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과의 사랑의 관계를 위해 끊임없이 찾아 오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둘째, 인간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하나님은 권능보단 사랑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기적으로도 쉽게 변하지 않는 무쇠덩이이다. 그러나 오히려 사랑과 희생을 통해 얻어질 수 있음을 이솝도 ‘해와 바람’이라는 우화로 말해주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은 이러한 아이러니를 아셨다. 마음껏 보여주실 때는 오히려 믿지 않은 인간들에 대해 이제는 정반대로 하신 것이다. 아예, 숨어버리신 것이다... 이를 묘사한 얀시는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Divine Shyness”(하나님의 수줍어 하심)이라는 표현으로 불렀다. 오늘날은 어떠한가? 오늘날 같이 부조리한 시대에 우리의 바람대로 하나님이 권능으로 나타나실 만 하지도 않을까?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신다. 그의 최고의 사랑이고 희생이었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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