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votion] 10 Days of Prayer, Day 4. God-Surfing
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경험이 가능한가?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다양할 수 있다. 기적을 통해서도. 꿈과 환상을 통해서도. 성경말씀이나 묵상을 통해서도. 그리고 자연을 통해서도. 더군다나 삼위일체로 계신 성부, 성자,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경험하는 자들마다 그 경험들이 독특하고 기상천외일수 있다. 일찍이 초대교회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그리고 결국 이단과 구별시킬 정통을 마련하였다: 성부는 하나님, 성자도 하나님, 성령도 하나님, 그러나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과 다르고, 성령도 성부가 아니다… 어찌 보면 참 싱거운 결론이다. 삼위일체를 설명해 보려던 어떠한 시도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 보니 이토록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metaphysical) 정의를 하여 놓은 것이다. 부정을 통한 정의라 하여 ‘apophatic’ definition이라 부른다. 철학을 중시하고 철학적 세계관을 가진 헬라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결론이라 하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해 본적이 있다고 감히 말해보고 싶다. 깊은 사고를 통해서도, 책을 통해서도 아니다. 그야말로 ‘경험’을 통한 통찰이라고 할까? 한번은 가족들과 여름휴가를 간 적이 있다. 해안가에 펼쳐진 모래둔덕(dunes)엔 행글라이더 체험이라는 광고가 붙어있었다. 한번도 행글라이딩을 한적이 없는 자라도 단돈 100불에 할 수 있다는 광고였다. 한때 파일럿을 꿈꾸어보고 하늘을 날아 보고픈 로망에 그러한 꿈도 많이 꾸어본 나에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현장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아내를 설득하여 혼자 행글라이딩을 해보기로 하였다. 드디어 행글라이딩장에 도착했다. Tandem flight(쌍발비행) 였다. 즉, 앞에서 소형비행기가 로프로 연결된 행글라이더를 끌고 3000피트까지 끌고 올라가는 것이다. 비행기 두 대가 같이 오른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말이다. 물론 행글라이더에는 나만 타는 것이 아니라 파일럿이 따로 있었다. 나는 단지 파일럿 위에 위치한 슬리핑백 같은 객석에 들어가 양쪽에 있는 글라이더의 프레임을 붙잡고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비행기는 순식간에 삼천 피트로 올랐다. 긴장된 상태에서 몇 초도 안 되는 시간이었다. 어느덧 공중에 뜬 나에겐 모래언덕들과 초목들과 바닷가 해안의 아름다운 모습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딱하며 무언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왔다. 행글라이더를 끌고 있던 모기(母機)에 연결된 로프로부터 행글라이더가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행글라이더는 비로소 자유로이 하늘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곡예비행(acrobatic flight)도 시도하였다. 그러나 나를 두려움으로 사로잡은 것은 높은 고도도 롤러코스터 같은 파일럿의 곡예비행도 아니었다. 바로 ‘바람’이었다. 구름 한 점 없었던 청명한 날씨에 바람은 있을 것 같지도 보이지도 않는 날씨였건만 고도에 올라보니 바람의 위력을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센지 내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면 그 바람에 나는 날려갈 수 있을만한 정도였다. 그러나 그 바람이 없다면 어찌 행글라이더가 비행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행글라이더를 떠받고 있는 그 거대한 바람을 탐으로(surfing) 인해 비행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과정에서 순간 나에겐 ‘삼위일체’라는 영감이 떠올랐다. 그렇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과 같은 성령을 체험한 것이다. 내 밑에서 조종간을 잡고 있는 파일럿은 예수님과 같았다. 그렇다면 처음 행글라이더를 끈 경비행기는 성부 하나님이었겠구나 라는 유비적 생각이 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전혀 기대해보지 못한 경험을 통해 ’삼위일체’하나님을 체험해보았다고 할까... 비록 30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3시간은 걸린 것 같은 비행을 마치고 행글라이더는 안착하였다. 나의 버킷리스트 하나는 지운 셈이다. 그러나 God-surfing의 경험은 지울 수 없는 값진 추억이 되었다. 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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