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Showing posts from May, 2024

[Devotion] 10 Days of Prayer, Day 10. Holy Spirit as Disturber

Image
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역사 속에 임했던 성령의 역사는 언제나 상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공동체적이고 보편적인 역사인 동시에 개인적이며 독특하기에 한마디로 논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 역사에 있어서도 성령론 만큼 다른 해석을 갖고 있는 영역은 없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성령의 사역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그(성령)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한 것이다. 성령은 ‘보혜사’(Comforter)의 영이시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 위로와 안위를 주시는 분이시기에 앞서 죄의 문제를 다루 실 분으로 오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은 ‘책망의 영’(Disturber)이시다. 영적 갱신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미국과 스코틀랜드에 있었던 1차대각성운동의 현장들을 돌아보며 또한 그 기록들을 읽어보면서 성령의 역사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대각성운동은 죄를 질타하고 중생을 강조했던 영적 갱신운동이었지만 그 메시지는 언제나 두 가지 다른 반응을 불러왔다. 이에 대해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일부는 죄를 회개하고 영적으로 거듭남(regeneration)의 체험으로, 일부는 이에 대해 편견을 갖고 영적으로 역행(degeneration)하는 반응으로 맞섰다고 논하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반응은 결국 교회를 분열시키고 만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광신적으로 비추어질 만큼 감정적, 신체적으로도 이상스러운(extraordinary) 현상들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러기에 이 영적 각성의 시기는 또한 이러한 현상들에 대한 이해에 대단한 혼돈기이기도 했다. 그 자신의 교회에서 이미 영적 대각성을 목도한 에드워즈는 이러한 때 깊은 성찰로 대각성운동을 변호한 신학적 대변자요 목회자였다. 일단 그는 그가 말하는 소위 ‘Religious Affection’(신앙적 열정 혹은 감성)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는 신앙적 열...

[Devotion] 10 Days of Prayer, Day 9. 그분만의 이유

Image
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1956년 전 미국을 놀라게 할 기사가 Life 매거진의 1월30일 이슈에 나갔다. 에쿠아도르 정글에서 살해당한 5명의 미국선교사들에 관한 것이었다. 이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아우카(Auca)족이 사는 정글로 향했다. 이중 파일럿이었던 네이트(Nate Saint)는 부족 마을을 발견한 후 친근감을 유도하기 위해 몇 달간 공중에서 선회비행을 하면서 바구니에 이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을 넣어 떨어뜨리며 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했다. 애교와 위트가 넘치는 기발한 전략이었다. 나름 여러 차례 이들과 접촉을 시도한 선교사들은 드디어 원주민가운데 일부를 만나 친근한 우정의 표시로 비행기를 태워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혀 언어가 다른 이들과 면대면 손짓과 몸짓으로만 소통할 수 밖에 없던 선교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사건 이야기를 제스처로 묘사하였다. 로마군병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채찍으로 치며 창으로 찌르는 장면 등등... 그러나 얼마 후 이들은 모두 창에 찔린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고 말았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당시 이들 부족가운데는 내분도 있었고 그로 인해 한 원주민 자매는 그들 공동체를 떠나 선교사들 가족과 지낸 일도 있었다. 어떠한 연고에서였는지 이들에 관해 전해들은 바에 대한 오해가 부족인들 가운데 있었을지도 모른다.  신학교에서 선교학을 공부하던 중 이들에 관해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난다. 그들의 선교적 동기나 헌신에 대해선 A를 줄 수 있지만, 선교학교수로서 이들의 접근 방식에 관해 점수를 매긴다면 아마도 D이상은 어려울 것이라는 것. 어찌 보면 오랫동안 부족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언어와 관습으로 충분한 인식의 공감대를 형성했어야 하기도 전 너무 성급했던 행동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다큐로도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 미망인들 가운데 한 분인 엘리자베스가 인터뷰에서 한 말을 잊을 수가 없다. “5명의 선교사들은 왜 그들이 그러한 죽음을 맞이했는지 이유도 모르고 죽었...

[Devotion] 10 Days of Prayer, Day 8. No Waste for God

Image
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거두시는 열매는 때로 우리의 기대와 많이 다름을 본다. 윌리엄(William Whiting Borden, 1887-1913)은 시카고의 부유한 백만장자 사업가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남북전쟁 당시 진공에서 우유의 수분을 제거해내는 농축우유 제법의 특허기술개발로 엄청난 부를 얻게 되었다. 지금도 이 사업은 지속되어 그로서리에 가면 Borden이란 트레이드마크의 유제품이 나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문의 유산을 이어 장차 훌륭한 비즈니스맨으로 키울 의도로 윌리엄의 부모는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대학진학을 하기 전 1년간을 해외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한다. 부유한 가문이 아니고선 가능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는 일본, 중국, 인도 등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순방하고 영국에 들른 때 때마침 그곳에 와 부흥회를 인도한 토레이(R. A. Torrey)목사의 설교를 듣고 선교사로서의 부름을 확신하게 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윌리엄은 곧 예일대로 진학한다. 그러나 그에게 대학생활은 단순한 학창생활이 아니었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발견한 그는 학업과 운동은 물론, 복음활동에도 특심을 내었다. 1학년 때 시작한 성경공부모임이 졸업 시에는 1000명이 넘는 모임으로 발전하였고, 2학년 때는 Yale Hope Mission이란 선교단체를 조직하여 어려운 이웃들을 살피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예일에서 훗날 선교역사가가 될 라투렛(Kenneth Scott Latourette)과도 친분을 쌓았다. 라투렛은 훗날 그를 사도바울의 기상을 가진 학생이었다고 회고했다. 대학시절 참여한 한 선교대회에서 이슬람선교의 사도라 불린 선교사 즈웸머(Samuel Zwemer)로부터 도전을 받아 이슬람선교를 위한 뜻을 정하게 된다. 그는 당시 학생자원선교운동(SVM)에도 헌신하여 예일역사상 가장 많은 자원자를 동원하는 일에도 헌신하였다. 예일 졸업 후 그는 프린스턴신학교로 진학하여 신학훈련을 받는다. 그는 재학 당시 열...

[Devotion] 10 Days of Prayer, Day 7. 테넌트의 무덤

Image
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미국 펜실바니아주 네샤미니(Neshaminy) 교회의 묘지에는 테넌트(William Tennent, 1673-1746) 목사님의 무덤이 있다. 장로교 목사가 된 나는 테넌트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를 목사고시를 준비하는 과정 중 미국장로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접한 바가 있었다. 이후 나는 프린스턴신학교에 와서 공부하는 가운데 테넌트 목사님의 행적에 관해 좀더 자세히 파고들게 되었다. 영적 각성운동에 특히 관심이 많은 터라 그러했다. 테넌트 목사님은 스코틀랜드 태생의 목사로 아일랜드에서 장로교목사로 목회를 하다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당시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로서 종교박해를 피해 이주해온 필그림으로부터 몇 세대가 지나면서 청교도신앙의 이상과 열정은 대부분 식어버린 분위기였다. 영적으로 깨어있는 목사님들은 이토록 영적으로 폐허가 된 이 땅에 대해 부담과 소명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 미국에는 하버드대학교와 예일대학교 정도 밖에는 목회자를 양성 시킬만한 학교가 없었다. 그러나 이 두 대학 역시 초기의 이상과 멀어져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갱신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상태였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테넌트 목사는 자신의 통나무로 만든 집에서 자신의 네 아들들과 주변의 뜻있는 청년들을 모아 부흥사들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을 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보고 유럽을 비롯 기존의 대학에서 교육받은 목사들은 비아냥거리며 그가 시작한 학교를 일컬어 ‘통나무대학’(Log College)이라고 부르며 조롱하였다. 1727년에 설립된 이 대학은 당시 부흥운동에 불을 지피며 미국의 대각성운동에 크게 일조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그의 죽음과 더불어 약 20년간 존재하였던 이 부흥사 양성소도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곳서 양성된 장로교 목사들은 뜻을 모아 통나무대학의 DNA를 품은 수 많은 학교들을 세웠다. 그 중 하나로 본격적 부흥운동을 이어갈 목회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대학이 있었으니 오늘날 프린스턴대학...

[Devotion] 10 Days of Prayer, Day 6. 닭이 먼저 알이 먼저?

Image
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이 질문은 아마도 창조론자와 진화론자들에겐 치열한 논쟁을 가져올 질문일 것이다. 당연 창조론자들은 닭이 먼저라고 주장할 것이고, 진화론자들은 달걀이 먼저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질문을 좀 다른 영역에 던져보려고 한다. 바로 선교와 관련되어서이다. 질문을 이렇게 해본다. 선교가 먼저인가, 성경이 먼저인가? 어느 것이 더 기원적이냐는 의미에서 묻는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교회와 전통의 권위에 기반한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다. 당연 개혁가들은 진정한 권위를 ’성경’에 두고 ‘sola scriptura’(Bible only)라는 기치아래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복음을 재발견함으로 믿음으로(sola fide)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의 도를 깨닫고, 성경번역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하였다.  그러한 전통의 유산에서 개신교회들은 ‘성경’의 권위아래 모든 것을 살펴보고 판단하게 되었다.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 교회들이 즐겨 쓰는 ‘성경적’이라는 수사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선교도 성경적으로 하는가 물으며 선교를 평가하기도 한다. 성경에 기반한 개신교의 중심사상을 조금도 의심하거나 나무랄 생각은 없다.  오늘날 일고 있는 선교적 각성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선교적’ 이해(mission Dei), 교회에 대한 ‘선교적’ 이해(missional church), 그리고 성경에 대한 ‘선교적’ 이해에서 소위 선교적 해석학(missional hermeneutic)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그간 선교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의 사역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신학과 교회로부터 주변부로 전락되는 것에 대한 통렬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천 년이 넘게 크리스텐덤(Christendom)적 구조에서 선교와 교회가 분리된 일에 대한 새로운 각성과 자각이 서구기독교에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가운데 있는 목소리로 ...

[Devotion] 10 Days of Prayer, Day 5. Harp of the Holy Spirit

Image
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에프렘(Ephrem, 306-373)은 시리아의 교부, 신학자, 찬송작가로 “Harp of the Holy Spirit”이라는 별명과 “Doctor of the Church”라는 칭호를 얻은 자이다. “성령의 수금”이라고 하였으니 그가 예배를 위해 얼마나 많고 아름다운 찬송을 작시하였는지를 상상케한다. 그는 또한 신학자였지만 신학적 서술이 운율적이다. 마치 시편과 같다고 할까?  시리아적인 문화방식이 하나님을 이해하고 묘사하는 방법에서 그리스적인 방식과 달랐다. 헬라적 방식은 산문적이기 때문이었다. 헬라적 방식이 사변적이고 추상명사를 많이 썼다면 시리아적 방식은 구체적이고 보통명사를 많이 썼다고 보면 된다. 헬라적 방식이 우화적(allegorical)인 반면, 시리아적 방식은 상징적(typological) 이었다. 이미 자연의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거룩한 상징물들로서 곧 성례(sacrament)와 같은 reminder로서의 기능을 가진다는 것이다. 마치,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가리키는 것처럼. 에프렘의 이러한 신학적 방식은 결코 일상이 무의미하거나 지루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신비로 가득 차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신비를 볼 수 있는 시각과 인식인 것이다. 삶이 풍성해 진다. 예를 들어 시리아 지역에서 널리 불린 찬송가로 알려진 솔로몬의 송시집(The Odes of Solomon)엔 이러한 구절이 있다:  한 잔의 젖이 나에게 제공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주님의 인자의 달콤함으로 마셨다 독생자가 첫 잔이며 성부는 젖을 내는 그분이며 성령은 그 분에게 젖을 먹이는 그녀이다.  ─솔로몬의 송시집 19편 중에서 삼위일체적인 운율의 이 시가 얼마나 또한 목가적인가? 이는 당시 목축문화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젖(우유)이 자연스러운 소재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에프렘의 찬송시에는 또한 인류의 첫 어머니인 이브의 불순종과 구...

[Devotion] 10 Days of Prayer, Day 4. God-Surfing

Image
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경험이 가능한가?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다양할 수 있다. 기적을 통해서도. 꿈과 환상을 통해서도. 성경말씀이나 묵상을 통해서도. 그리고 자연을 통해서도. 더군다나 삼위일체로 계신 성부, 성자, 성령을 어떻게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경험하는 자들마다 그 경험들이 독특하고 기상천외일수 있다. 일찍이 초대교회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그리고 결국 이단과 구별시킬 정통을 마련하였다: 성부는 하나님, 성자도 하나님, 성령도 하나님, 그러나 성부는 성자가 아니고, 성자는 성령과 다르고, 성령도 성부가 아니다… 어찌 보면 참 싱거운 결론이다. 삼위일체를 설명해 보려던 어떠한 시도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다 보니 이토록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metaphysical) 정의를 하여 놓은 것이다. 부정을 통한 정의라 하여 ‘apophatic’ definition이라 부른다. 철학을 중시하고 철학적 세계관을 가진 헬라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결론이라 하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해 본적이 있다고 감히 말해보고 싶다. 깊은 사고를 통해서도, 책을 통해서도 아니다. 그야말로 ‘경험’을 통한 통찰이라고 할까? 한번은 가족들과 여름휴가를 간 적이 있다. 해안가에 펼쳐진 모래둔덕(dunes)엔 행글라이더 체험이라는 광고가 붙어있었다. 한번도 행글라이딩을 한적이 없는 자라도 단돈 100불에 할 수 있다는 광고였다.  한때 파일럿을 꿈꾸어보고 하늘을 날아 보고픈 로망에 그러한 꿈도 많이 꾸어본 나에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현장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아내를 설득하여 혼자 행글라이딩을 해보기로 하였다. 드디어 행글라이딩장에 도착했다. Tandem flight(쌍발비행) 였다. 즉, 앞에서 소형비행기가 로프로 연결된 행글라이더를 끌고 3000피트까지 끌고 올라가는 것이다. 비행기 두 대가 같이 오른다는 의미에서 붙여...

[Devotion] 10 Days of Prayer, Day 3. Divine Shyness

Image
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기독교작가 필립 얀시(Philip Yancey)가 쓴 Disappointment with God(하나님께 실망을)이라는 책이 있다. 거기서 얀시는 의미 있는 관찰을 한다. 구속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소통(communication) 방식이라 할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볼 때 그 초기에는 권능(mighty power)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된다. 애굽의 열 재앙, 홍해를 가르는 기적, 시내산의 불과 연기 나팔소리, 불기둥과 구름기둥, 만나와 물, 여리고성의 함락 등등… 구약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역사들이 하도 크다 보니 주변민족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관해 간담이 녹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수2:9-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일관됨을 본다.  성전에 불로서 나타난 역사를 본 솔로몬,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를 통해 임한 하나님의 능력을 본 아합과 선지자들. 그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들의 심성엔 변화가 없었다. 아무리 대단한 기적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믿음과 영성을 증진시키는 일엔 실패하였다는 것이다. 얀시는 인간을 다루시는 전략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권능을 버리고 사랑으로 접근했다고 말한다. 그 사랑이 희생을 동반할 때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긴긴 구약의 역사 후 하나님은 400년 동안 숨어 계시다가 성육신하셔서 친히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 그가 많은 기적을 행하였지만 어떤 이들은 그가 바알세불, 즉 마귀의 능력을 빌어 일으킨 기적이라고 비난한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면(눅16:19-31) 음부의 고통을 맛본 부자가 그 남은 친척들에게 음부에 오지 말라는 메신저를 보내달라 하였을 때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모세와 선지자들을 듣지 아니하면 설령 죽은 자가 살아나서 아무리 떠든다 한들 믿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주님의 승천 후 또 한번의 역사가 있었다. 바로 ...

[Devotion] 10 Days of Prayer, Day 2. Who is My Neighbor?

Image
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아내와 함께 차에서 듣게 된 한 복음방송의 초대석에서 한 선교사님의 간증을 들었다. 남미의 마약중독자들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님이었다. 잔잔한 감동의 그 간증을 들으며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질문이 마음속으로 찾아왔다. 과연 내 이웃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이미 성경에는 한 율법사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과의 대화가 기록되어있다(눅10:25-29).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유도하시기 위해서인지 예수님은 율법(구약성경)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 물으며 대화를 이끄신다. 율법을 잘 아는 율법사의 답은 예수님도 기대하고 있었던 답변이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10:27). 이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율법 중에 어느 것이 큰 계명인지를 묻는 질문(마22:36)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과도 일치한다(마22:34-40; 막12:28-34). 두 가지 큰 계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10계명의 기본적인 구성이기도 하고 예수님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22:40)이라고 하신 것처럼 모세오경과 여러 예언서를 통해 거듭 확인되는 말씀이다. 이러한 신애와 인애는 동양에서조차도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사상으로 표현되어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것은 지당한 일일 것이다. 여기서 오히려 내 마음을 두드리는 질문은 나는 과연 내 이웃을 사랑하고 있느냐는 후자의 계명이고, 더 나아가 내가 내 몸같이 사랑하고 있는 이웃이 과연 있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내 몸처럼 아끼고 돌보며 사랑하고 있는 이들(他者), 다시 말해 성경이 지칭하는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이는 예수님과의 대화를 듣고 연이어 던진 한 율법사의 바로 그 질문,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눅10:29)이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Devotion] 10 Days of Prayer, Day 1. Ten Days

Image
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보면 참 오묘하기 그지없다. 구약에 나타난 절기들을 보면 구속사의 의미를 상징하며 기가 막히게 맞물려있음을 보게 된다. “안식일 이튿날” 곧 유월절 기간의 안식일(토요일)이 지난 다음날(일요일)을 구약에선 초실절(레23:9-14)로 지켰다. 곡물(보리) 추수의 첫 소산을 바치는 날이었다. 신약에선 이날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되었다. 오순절(Pentecost)은 바로 이 초실절(일요일)을 첫날로 카운트하여 일곱 번째 안식일 이튿날(일요일이 됨)이 되는 날이다. 즉 초실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로 곡물(밀)로 만든 떡 두 덩이를 제사로 드리는 날이었고(레23:15-21) 이를 맥추절(Feast of Harvest,  출23:16) 혹은 칠칠절(Feast of Weeks, 출34:22)이라 불렀다. 히브리어로 Shavuot이라 불리는 오순절은 대략 오늘날 5월 중순에서 6월 중순 사이에 떨어지게 된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이 오순절을 시내광야에서 십계명을 받은 날로 연관을 짓고 있는데 구약에 의하면 유월절날(니산월14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두어 달이 지나 맞은 제 3월(유대력으론 시완월)에 시내광야에 이르고(출19:1), 시내산에서 두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을 받는다. 마치 두 돌판이 두 떡덩이를 연상시키기나 하듯이. 그런데 신약에서는 이 오순절날 성령이 강림하신 것으로 기록되어있다(행2:1).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40일을 이 땅에 계시다 승천하셨다(행1:3). 승천하시기 전 이르시길 예루살렘에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심을 기다리라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복음전파의 위대한 위임(The Great Commission)을 주셨다. 약 120명의 성도가 다락에서 기다리며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놀라운 강림이 이들 위에 임했던 것이다. 이 기도가운데 기다림의 시간이 꼭 “10일”이 된다.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님의 강림 사이의 기간이다.  개신교에서는 예수...

[Ministry Newsletter] May, 2024

Im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