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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ing posts from March, 2024

[Ministry Newsletter] April,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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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otion] Passion Week, Day 7. Do You Love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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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뵐 낯짝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와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신 주님은 조반을 준비하셨고 다시금 주님을 가까이 대면한 그와 예수님의 대화가 시작된다. 이 쑥스런 상황에서 말을 먼저 건넨 이는 물론 주님이셨다. 질문은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였다(요21:15). 비교급이었다. 베드로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보다 자신이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는 감옥과 죽음까지 불사하겠노라고 한 바가 있었다(눅22:33). 주님은 두 번째 질문으로 이어간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였다. 세 번째도 역시 같은 질문이었다. 세 번씩이나 되풀이 되는 같은 질문에 베드로의 대답은 점점 더 자신감이 약해져 가는 것 같이 보인다. 왜 세 번씩이나? 그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해서일까? 그런데 더 의아한 것은 예수님의 답변이다. 고맙다라는 말도, 섭섭했었다라는 말도 아니고 뜬금없는 말처럼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말로만 대꾸하신다. 베드로의 심정을 몰라 동문서답하실 분이 아니지 않는가? 비록 세 번씩이나 그를 부인한 것이 사실이나 주님은 누구보다 베드로가 그를 향해 갖고 있는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알고 계신 분이시다. 그의 연약함을 가장 체휼하시는 분이시다. 요한이 기술한 이 대화에서 나타나는 간극은 사실 누가의 기록에서 풀린다.   누가는 유월절 만찬에서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눅22:31-34). 사단이 베드로를 밀까부듯 하려고 청구하고 있다고 하신다. 베드로를 농락하려는 사단의 획책을 알고 계신 것이다. 사단도 이러한 농락을 요청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의 ’허락’ 없이는 농락마저도 불가능함을 시사한다. 이러한 획책을 불허하심으로 충분히 사단의 소행을 막으실 수 있는 주님이시겠지만 그분의 답변은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는 말씀

[Devotion] Passion Week, Day 6. 하나님의 속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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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20대 초반 어느 수련회에서 말씀을 나누다가 창세기22장의 베일이 벗겨지며 그 진의를 깨달은 적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독자 이삭을 바치는 장면이다. 그때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논리적으로는 25년을 기다리다 얻은 독자 이삭을 왜 느닷없이 번제로 바치라는 것이었는지… 그렇다면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하신 약속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지... 감정적으로나 의지적으로는 왜 하나님이 불로 태워 바치는 잔인한 인신제물을 요구한 것인지, 그리고 가장 아끼고 싶은 것을 달라고 요구하는 신에게 과연 순종할 수 있는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 사건에 대한 수많은 설교의 방점은 대부분 ‘순종’에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게 인식된 하나님은 가련한 아브라함의 순종 테스트를 차가운 시선으로 관조하는 신으로 밖에는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인공과 핵심은 아브라함도 순종도 아닌 또 다른 차원에 있었다. 바로 숨겨진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이 사건의 진의를 볼 수 있는 단어는 ‘독자’(only son)이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창22:12). Sounds familiar? 어딘가 익숙한 표현이 아닌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구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요한은 분명 창세기의 이 장면을 생각하고 이 구절을 기록하였으리라 본다.  그 수련회 이후 나는 이 장면을 순종 테스트라는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이삭이 이후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리아의 현장은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에겐 바로 갈보리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고뇌보다 더 큰 고뇌로 이 현장에 참여하고 계신 하나님... 오직 다른 점이 있다면 아브라함의 독자 이삭은 죽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독자 예수님은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 사

[Devotion] Passion Week, Day 5. "저를 기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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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4복음서의 기자가 모두 빼놓지 않고 기록한 사건이 있다. 바로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야기이다. 마태복음(26:6-13)과 마가복음(14:3-8)엔 머리에 부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누가복음(7:36-50)과 요한복음(12:1-8)엔 발에 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머리와 발 모두에 향유를 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통적인 것은 예수님께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의 행적을 기념하라고 하신 데로(마태, 마가), 4복음서의 기자들은 한결같이 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복음서에 등장하는 이 여인이 모두 동일인인지 아닌지는 더 잘 살펴보아야겠지만, 특히 사도 요한은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이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임을 언급하고 있다(요12:3). 이 마리아와 또 다른 누이였던 마르다의 이야기가 누가복음10:38-42에 짤막이 언급 되어 있다. 나사로의 집에 들린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마르다는 분주히 부엌 일에 여념이 없었다. 반면 예수님 곁에 바짝 붙어 말씀을 청종하는 마리아를 향해 짜증난 투로 예수님께 자기를 돕게 하라고 잔 소리를 요청한 마르다에 대해 예수님은 그리 시킬 의사가 없다고 대꾸하신다. 너무 많은 일에 염려하느라 바쁜 것 보단 한가지에만(only one thing) 족해도 된다는 것과, 그 정황에서 마리아의 행동은 사실  더 좋은(적절한)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비교하며 전형적인 행동패턴의 인물로 정형화하여 누가 더 좋고 아닌지를 가린다면 이는 현실을 왜곡할 수 있고 취지에도 맞지 않을 것이다. 우리 속엔 두 가지 성향이 같이 있다. 더 좋은 선택의 훈련이 필요하다. 마르다를 향한 주님의 대꾸는 나무라는 투가 아니었고 오히려 안쓰러운 음성이라 볼 수 있다. 모두를 사랑하시는 주님이기 때문이다. 그 정황에서 마르다는 손 대접하는 마음이 곧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love language)이었다고 생각했었을 것이고, 마리아는 주님의 말에 경청해주는

[Devotion] Passion Week, Day 4. 예수님의 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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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성경을 읽다 보면 재미난 반전드라마가 있는 경우를 본다. 표현하자면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이다. 복음서는 공생애 사역이 끝나가면서 자신의 죽음에 관해 비장한 마음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반면 전혀 상황을 인식하지도 예측하지도 못하는 제자들의 웃지 못할 반응들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권능이 드러나고 그 인기가 점점 더 높아질 수록 이러한 인식의 갭은 더 크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상황이 마가복음10:35-45의 대화에 기록되어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 세베대의 아들들이라 불리는 야고보와 요한이 등장한다. 이들에 대해 예수님은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더하셨다(막3:17). 이로 보건대 이 두 사람의 성격이 한 가닥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실례로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 사마리아인들에게 이 두 형제가 불을 명하여 멸하게 해달라고 한 경우나(눅9:54), 자기들과 한 패가 아니면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좇는 다른 이들을 금하게 한 요한의 경우(눅9:49)를 보면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얼마나 편협하고 폐쇄적인 인간들인가? 여기에 더한 것은 이들의 어머니까지 한몫 했다는 점. 마태복음20:20-21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께 나와 두 아들을 하나는 예수님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않게 해달라는 청탁을 한다. 당대에도 치마바람이 있었나? 이 얼마나 당차면서도 당돌한 요구인가? 예수님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하셨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신다. 무엇을 생각하였는지는 모르나 야고보와 요한은 “할 수 있나이다”라고 대답한다. 이 무슨 동상이몽이란 말인가? 참으로 낭패스러운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하지만 한 수 더 뜨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예수님의 반전인 것이다. 마치 능청맞은 듯한 투로 여유있게 받아 넘기시는 것 같다. “너희가 나의 마시

[Devotion] Passion Week, Day 3. 신과 인간의 에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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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욥은 고난의 문제, 특히 의인의 고난을 다루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욥기는 단순히 고난보다 더 깊고 난해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욥이라는 한 인물을 통해 신과 인간의 사랑의 관계를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까? 욥기의 서두는 정황설명으로부터 시작한다. 여호와 하나님, 세상을 두루 순찰하고 온 사단, 그리고 우스 땅 동방에서 도덕적으로 가장 의롭고 재물로도 가장 부자인 욥이 등장한다. 얼핏 사단이 시비를 거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자세히 보면 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진 하나님이 먼저 발단을 만든다. 사단의 시비는 이에 대해 찾아온 것이다: “그의 소유를 치소서, 과연 욥이 어떻게 하나 봅시다…” 사단의 시비는 이런 것이었다. 사단의 주장에 의하면 욥의 하나님 경외는 ‘조건적’일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단 사이의 시비는 단순한 시비가 아니라 대단히 중요한 이슈를 다루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 과연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그 수준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존재인지 아닌지를 가려보자는 시비이다. 이러한 욥을 맞대고 사단은 사실 하나님의 자부심을 건드린다고 봐도 될 것 같다. 욥은 단순한 한 개인으로 시험을 받는다기 보다 인간을 대표한 자로서 시험의 주목대상이 되고 있는 듯하다. 조건이 전제되지 않은 신과 인간의 관계가 가능할 것인가? 사랑은 절대로 강압으로 얻을 수 없다. 스스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고선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왜 그런지 욥기를 읽을 때 한국의 고전인 춘향전이 생각난다. 어설픈 비교이긴 하지만 여기에도 욥기의 초두와 같이 삼자가 개입되어 있다. 스토리의 가장 중요한 골자는 사랑의 ‘정절’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테스트를 받는 것인가 보다. 흔히 아가페 사랑은 완전한 충족에서 흘러 넘치는 사랑이라고 한다면 에로스 사랑은 무엇인가 결핍에서 그 요구를 찾는  사랑이라고 대비한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자에게서 사랑과

[Devotion] Passion Week, Day 2. The Gos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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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진정한 복음은 무엇일까? 복음의 진수와 속성은 어떤 것인가? 아마도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실례를 들자면 요한복음에서 간음한 여인에게 보인 예수님의 모습이리라(요8:1-11). 간음한 여인을 예수 앞에 끌고 와 돌로 치려는 이 현장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언행은 무엇이 복음의 핵심이고 그 속성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님은 완벽한 공의와 사랑으로 이 딜레마적인 절체절명의 순간을 대응하셨다. 율법으로는 돌로 쳐죽임을 당함이 마땅하다. 예수님은 이러한 율법의 공의를 부정하지 않으셨다.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신다. 누구도 예수님 앞에서 돌을 던지지 못하고 떠나갔다. 여인과 주님만이 독대한 그 순간 누구보다 돌 던질 자격이 될 수 있는 이분이 정죄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신다. 복음의 핵심은 ‘죄사함’에 있다.  세상의 많은 이들은 기독교의 복음을 가장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것이라 비난한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란 말을 싫어한다. 왜, 예수만 믿어야 되냐고. 부처도 있고 공자도 있고 알라도 있는데…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정말 타당한 것인가? 심지어 기독교인 가운데도 이러한 배타성을 싫어하는 이들이 있다. 이러한 인식은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철저한 오해이다. 종교신학에서는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태도에 있어 크게 세 가지로 나누고 있다. 배타주의(exclusivism), 포용주의(inclusivism), 다원주의(pluralism)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들을 기회가 정말 있었느냐는 복잡한 정황에 대해 단순한 프레임으로만 설명하기엔 한계가 있다. 종종 우린 기독교는 배타적(exclusive) 종교인가 포용적(inclusive) 종교인가라는 단순화된 대비로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무엇이 올바른 답변이겠는가? 진정한 답변은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기초할 것이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most exclusive yet most

[Devotion] Passion Week, Day 1. You Raise Me 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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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나는 팝송을 즐겨 듣는다.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고 몇 년이 지나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부터였다. 물론 그 당시는 막 겉멋이 들기 시작하던 사춘기 때이기도 하고 막연히 외국 것이 좋아 보이던 때였다. 7080 세대이다 보니 자연히 당시 유행했던 ABBA, Carpenters, Olivia Newton-John과 같은 가수들의 음악을 좋아했다. 지금도 당시의 향수를 revisiting하며 즐겨 듣곤 한다. 그 당시에는 섣부른 실력에 영어내용도 모르고 멜로디에 젖어서만 좋아했던 그 노래들을 이제 어느 정도 영어에 익숙한 시점에서 들어보면 전혀 새삼스럽게 가사의 의미가 다가오는 일이 많다. 보니까 겉멋으로만 부르기에는 매우 의미심장하고 동감이 가는 가사들인 것이다. 뜻도 모르고 불렀던 노래들이 이제는 영적인 메시지까지 담고 있는 것들이 많음을 본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50년대, 60년대 노래들까지 옛 음악이 더 좋고 친숙하다. 나는 한마디로 옛 것을 좋아하는 올드 소울(old soul)이다.  종종 찬송가나 복음성가는 아니지만 그 의미는 웬만한 Christian song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는 노래들이 많다. 그 중 하나를 꼽으라면 “You raise me up”이라는 노래일 것이다. 가사를 소개해 본다. When I am down, and, oh, my soul, so weary When troubles come, and my heart burdened be Then, I am still and wait here in the silence Until you come and sit awhile with me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교회 안에서도 많이 불

[Devotion] Equal Night (교회사속의 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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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다고 해서 Equinox (Equal Night)라 이름붙여진 춘분. 해마다 양력으로 3월 20-21일경쯤 일어난다. 가을에 일어나는 같은 현상을 추분이라 부른다. 이는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지지 않고 똑바로 태양을 바라보는 때이다. 동양에서도 24절기 가운데 하나인 춘분은 봄을 알리는 절기이다.  기독교역사에서 볼 때 춘분은 구약의 유월절, 신약의 부활절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바로 이때를 기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춘분을 기점으로 고난절과 부활절의 교회력을 산출하여 준수했다. 그러나 시간사용이 통합되지 않았던 고대에는 교회력준수에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다.  근본적인 차이점의 한 예로 부활절 준수 일자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부활절은 범교회적으로 중요한 절기임에는 두 말할 나위가 없으나, 이를 준수하던 일자는 지역에 따라 달랐던 것이다. 결국 AD 325년에 있던 니케아 공회의(Council of Nicaea)에서는 이를 춘분을 지나 찾아 오는 첫 만월(full moon) 이후 첫 주일(Sunday)로 규정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력은 기독교내의 여러 전통에 따라 틀리게 준수되었다. 그 예로 켈트기독교와 로마기독교 사이의 차이를 들 수 있겠다. 서방기독교인 로마가톨릭은 예수님의 부활이 일요일에 발생한 것을 기준하여 부활절 요일을 주일(일요일)로 확정하여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켈트전통은 구약의 히브리 월력을 따라 니산월 14일, 즉, 유대인의 유월절날(Passover)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한 것이다. 따라서 음력 월력의 일자를 따른 켈트 전통에 의하면 부활절준수는 꼭 주일이 아닌 다른 요일에도 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결국 차이점은 단순히 켈트식과 로마식의 칼렌다 산출 방법이 틀린데서 기인한 것 뿐 아니라, 구약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고난을 강조하고 기록된 날짜(니산월 14일)를 따르려 했던 켈트전통과, 신약을 중심으로

[Devotion] St. Patr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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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어려서부터 나는 초록색이 좋았다. 자연의 색깔이라서 그런가? 미국에 와보니 녹색의 페스티벌이 있었다. 자연 녹색을 좋아하였으나 St. Patrick’s Day (March 17)는 내가 좋아하는 녹색만큼이나 친근하진 않았다. 교회사를 공부하며, 또 선교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패트릭(St. Patrick, c.385-461)이라고 하는 인물에 관해 알면서 이제는 녹색만큼이나 패트릭이 좋아진다. 패트릭에게선 녹색만큼이나 촌스러운 면도 있으나 녹색만큼이나 신선(fresh)한 맛도 풍기기 때문이다.  패트릭은 원래 영국사람(English)이었다. 당시 영국의 이웃으로 마주보고 있던 아일랜드(Ireland)는 친근한 벗으로가 아니라 흉악한 원수로 있었다. 영국과 스콧틀랜드의 해안으로 침입하여 노략하고 약탈해 가는 것이 그들의 산업이었다. 패트릭은 납치된 소년가운데 하나였다. 6년간 노예로 초원의 등성에서 양을 치며 밤하늘을 바라보았지만 낯선 땅, 노예로 잡힌 땅은 시간이 흘러도 정착될 수 없는 타향이었다. 밤마다 부르짖던 그의 소원에 응답이 온지라. 꿈에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드디어 그곳을 극적으로 탈출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한 그는 오랜 세월 자신의 죄성을 정화하며, 소명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 받쳐질 삶을 준비하였다. 그가 벗어난 땅에 대한 기억은 미련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다시 그 땅으로 인해 번민하여야 했다. 그를 노예로 삼은 그 땅, 거기서 부르는 환영이 그 이유였다. “성 소년 (holy youth), 패트릭, 우리에게 다시 와서 우리를 도와주라!” 그것이 성경에서 바울을 부른 마게도냐인의 환영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면 조금이나마 거절할 여유를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패트릭의 영혼 깊숙이 거부할 수 없는 소명으로 인해 밤마다 괴로워 했다. 정작 그를 자유케 한 것은 바로 그 거부할 수 없는 소명에 응답하여 자신의 운명을 내어 맡긴 순간부터였다. 이전엔 해적에게 잡혀 노

[Ministry Newsletter] March,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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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otion] Thy Kingdom 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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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역사의 최종 목표는 어디에 있는가 생각해 본다. 인생의 최종의미는 어디서 발견될 수 있을까 물어 본다. 미얀마에서 싸이클론으로 인해, 중국에선 지진으로 인해 죽은 희생자들의 가족이 흐르는 눈물들은 보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자아낸다. 수백 년간 왕정으로 있던 네팔이 공화국으로 정치체제를 바꾸려 한다. 왕이 있었지만 백성들에게 준 유익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실상 수년 전 비참한 최후로 왕과 왕비가 피살되고 말았다. 요사이 일어나는 많은 천재, 인재 등을 볼 때 마다, 정치적인 격돌 등을 볼 때 마다 찾아 오는 생각이다. 이렇게 불안하고 불완전한 세상이 반영해 주는 것이 무엇일까?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는 이세상… 이세상을 창조하신 완전하신 하나님의 완전한 구원하심은 반드시 와야만 되지 않겠는가? 완전한 그의 나라가 반드시 서야 되지 않겠는가?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이 이 땅에 왕국을 건설하려는 성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성경은 그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니므롯이 시날 땅에 건설하려 했던 나라에서부터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의 제국들의 등장을 본다. 끊임없이 제국을 향한 간단없는 움직임이 역사 속에 계속 되고 있다. 인간의 성정 안엔 하나님이 심어놓으신 당신의 형상의 일부인 ‘통치권’이 작동하고 있는 것이라 해석된다. 왕이나 지도자의 권한은 사실 하나님께로서 온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가르쳐주고 있다(요19:11). 결국 이세상 지도자들의 권세는 하나님께 속한 권세를 허락 받아 rent받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모두 죄인이기에 신성한 통치권을 제대로 쓴 자가 없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전환점이 된 신정에서 왕정으로의 이양 (사무엘상 배경) 은 이러한 하나님 외에 완전한 통치자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 역사적 교훈이었다. 어느 한 나라도 망하지 않고 지속된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역사상 스러져간 제국이나 왕국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결국은

[Devotion] The Gospel, History, and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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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사랑하고 역사에 관심있는 분들을 위해서. 하나님 사랑과 역사에 대한 나의 관심은 군대생활 중 꿀보다 더 달게 느껴졌던 성경을 읽으면서 유발되었다. 성경은 그 시작부터 끝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Love Story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구속의 대장정이었다. 당시 과학도였던 나는 그 때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시간속으로의 여정을 즐기게 되었다. 이후 미국에서 20년간 학업과 목회사역을 하면서 특별히 복음전파와 하나님나라의 확장이라는 시각에서 역사를 주목해왔다.   인류의 역사는 ‘복음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언젠가 저무는 석양을 보면서 시편 19편 (1-6절)의 말씀과 함께 이러한 영감이 떠 올랐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의 시작은 마치 태양이 하늘을 운행하는 것처럼 인류의 역사 속에 행보하여 왔다. 이제 서구의 기독교는 황혼의 시기에 접어들었다는 이야기들을 한다.  반면에 비서구 세계에서 일어나는 폭발적인 부흥과 선교운동들을 본다. 마치 석양은 이러한 실상을 설명해 주는 것 같다. 서구의 반대편 땅에선 복음의 빛이 여명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구촌 기독교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마치 ‘씨앗’과도 같다. 이 세상에 신비로운 하나님의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씨앗이라고 하는 잠재적 생명체일 것이다. 거기엔 하나님의 지혜와 솜씨로 완연히 발현될 생명의 모습이 DNA라고 하는 설계도에 담아져 신비스럽게도 포장되어 있다. 기나긴 지난 역사 속에서 이 복음은 지구촌 곳곳에 뿌리어지고,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어왔다. 그리고 또다시 씨앗을 창출해 낼 것이다. 오늘날 나와 여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열매인 것이다. 열매는 언제나 씨앗을 창출해 낸다. 나는 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복음의 에이전트’(The Gospel Agent)로 생각하고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또 말씀하신 그이처럼, 한 알의 밀알인 것이다. 이번에 이렇게 지면을 통해 나의 개인적인 관심과 사역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Celtic Christianity] Celtic Mission의 요람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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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 기독교의 상징인 Celtic Cross 켈트 기독교(Celtic Christianity)란 주후 5세기에서 7세기동안 주로 켈트족(아일랜드, 웨일즈, 스콧틀랜드지역에 켈트어를 썼던 족속) 및 브리톤족(앵글로-색슨족 침입이전 브리튼제도에 살고 있던 원주민)을 중심으로 발달한 기독교를 일컸는다. 역사적으로 이지역은 로마제국권 밖에 있었던 지역으로 이 지역의 기독교전통은 로마를 중심으로 확장된 기독교(Roman Christianity)와 흔히 대별하여 구분하기도 한다.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난 켈트 기독교는 유럽대륙을 중심으로 발달한 로마 기독교의 교구 중심적 제도(Diocesan system)와 달리 수도원 중심적 형태(Monastic system)로 발달하였다. 교구는 로마제국의 행정형태를 반영한 것으로 효과적 치리를 위해 지역을 분할 한 것을  말한다. 교구에는 이를 치리하는 한 감독(bishop)이 있다. 반면에 수도원은 수도원장(abbot)을 중심으로 한다. 아일랜드의 경우 수도원장은 주로 그 지방을 다스리던 귀족이나 지도층인사로 반드시 안수를 받은 사제는 아니었다. 교구중심적 제도가 교황과 같은 위로 부터의 권위로 부터 성직을 안수 받아 실행하던 중앙집권적 제도형태라면 수도원 중심의 신앙은 각 지역별로 수도원장을 중심으로 자치적인 권한으로 신앙공동체 생활을 유지한 지방분권적 제도의 형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켈트 기독교와 로마 기독교 전통사이의 차이점들은 점차 두 전통사이에 갈등을 불러오게 되었다. 근본적인 차이점의 한 예로 부활절 준수 일자를 들 수 있겠다. 부활절은 범교회적으로 중요한 절기임에는 두 말할 나위가 없으나, 이를 준수하던 일자는 지역에 따라 달랐던 것으로 통일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AD 325년에 있던 니케아 공회의(Council of Nicaea)에서는 이를 춘분을 지나 찾아 오는 첫 만월(full moon) 이후 첫 주일(sunday)로 규정지었다. 부활절 요일을 주일로 확정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일요일에 발생했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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